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책 소개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한국고전소설로 2000년 발행된 책입니다. 저자는 조세희, 출판은 이성과힘입니다. 2023년 현재 교보문고소설부분 78위이며입니다.
도시 빈민층의 삶의 좌절과 해환을 다룬 한국 문학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이 책의 설명은 아래와 같습니다.
난장이로 상징되는 못 가진 자와 거인으로 상징되는 가진 자 사이의 대립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우리시대의 불행과 행운, 질곡과 신생의 역설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조세희의 연작소설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1978년 초판을 발행한 이후, 최인훈의 광장과 더불어 100쇄를 넘어선 작품이다. 저자는 왜소하고 병신스런 모습의 '난장이'를 통해 산업시대에 접어든 우리 사회의 허구와 병리를 적나라하게 폭로하면서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야 할 꿈과 자유에의 열망을 보여준다. 표지는 판화가 이철수 씨의 판화로 꾸몄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읽고
이 책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읽은 한 대학생 형이 이렇게 말했다 ‘동균아 넌 이 책을 자세히 읽으면 안 돼 잘못하다간 반사회적인 인물이 될 수 있어’, ‘난 이 책을 몇 번을 읽었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이해가 잘 안가’
주로 부정적인 어투의 형들의 말 때문이었는지 책 제목 역시 심오해 보였는지는 몰라도 쉽사리 책에 손이 가지 않았지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읽게 되었다.
이 책은 총 12부로 구성된 연작소설이며 ‘난쟁이’로 상징되는 사회적 약자들의 비극적인 운명의 연속을 조세희 작가만의 방법으로 표현 해 내고 있다.
책을 보는 내내 나는 불편한 심기를 감출 수 없었다, 우선적으로 너무나도 조세희 작가만의 방법으로 되어있어서 이해하기 힘들었을 뿐만 아니라, 이야기의 처음에서 끝까지 모두 비극적인 내용이기 때문이다.
특히, 나에게 ‘달나라’라는 이 단어는 어린 시절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꿈과 희망 미지의 세계로의 향한 순수한 호기심’이 전부였고 그 이상 그 이하도 생각 해 본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쓰이는 ‘달나라’는 구렁텅이 같은 현실에서 도피를 상상 할 수 있는, 하지만 이루어지지 않는 마치 이루어지지 않을 유토피아적 세계로 그려지는 사실이 너무나 안타까웠고, 또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자살만이 달나라를 향한 길임을 보여주는 듯한 아버지의 행동이 나로 하여금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이 작품이 발표된 년도는 1976년, 즉 1970년대의 사실을 담고 있다, 그러나 나는 책을 읽는 내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2000년대를 떠 올릴 수 있었다.
난쟁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사회에서 흔히 약자로 표기되며 ‘개천에서 용난다’는 옛말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듯이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하루하루를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이 살아가며 절망하고 있는 사람들이 아직까지 얼마나 많은지, 그리고 우리가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관심을 주었는지, 또한 마치 불쌍한 사람들에게는 돈을 줘야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혀 지원금만 주고 진정으로 그들에게 필요한 편입된 시선을 거두지 않는 우리 사회가 나로 하여금 쓴 웃음을 짓게 만들었다.
이 소설에서 각 단원의 제목에서 나는 <잘못은 신에게도 있다>에 특히 주목했다, 흔히 보편적으로 ‘신’이라는 존재는 무결한 완벽한 존재이며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한계점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궁극체’로 여겨진다, 그런데 신에게도 잘못이 있다니, 종교인이 본다면 눈살을 찌푸릴만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나 역시 기독교인이긴 하지만 신에 대한 모독 때문에 눈살이 찌푸려진 것이 아니라, 당시 사회에서 대접받는 노동자의 모습을 보자니 눈살이 찌푸려지기 시작했다.
지금은 나아 졌겠지만, 1970년도 당시엔 노동자에 대한 인권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은 상태였다, 그랬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섭씨 30도 이상의 공장내부에서 제대로 자지도 못하고 졸면서 일을 했으며, 손에 피가 날 정도로 노동을 하였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노사 대표자 회의가 열려 노동자의 임금 인상과 정당한 이윤분배를 요구 했지만 그 말을 들은 채 만 채하며 자신들만의 사익만을 챙기는 사측의 행동이 열악했던 당시 사회와 다르게 발전한 지금을 비교하기엔 조금 무리가 있을 수도 있지만, 사측과 노동자 측의 대립이라는 본질적인 내용은 같기에 최근에 일어나고 있는 언론사의 파업과 겹쳐 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타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사장을 선출하고, 대한민국 기자들의 언론에 대한 자유를 제한하며, 정당한 명분으로 파업하고 있는 노동자들의 일부를 제명처리하고 그들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언론 계약직을 채용공고를 마구 내고, 그를 넘어 대한민국 국민들의 알 권리를 없애 눈과 귀를 멀게 하고 있는 언론사측의 몰상식한 행동이 최근 언론사에서 ‘노동’을 하길 원하는 나에게는 과연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언론계열 노동자들에게는 옛날의 작업환경의 열악함보다 좀 더 고차원적인 표현에 대한 자유가 주어지지 않는 것인가.
과연 내가 가고자 하는 이 길이 미래지향적으로 생각 할 때 내가 나만의 신념을 지킬 수 있을 까하는 의심마저 들게 하는 이 세상, 신마저 의심받을 정도의 세상임이 안타깝게도 공감되어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희망을 버리고 살순 없다, 사회에서 자신을 난쟁이라고 표현한다고 스스로 난쟁이라는 틀 안에서 살아갈 수만은 없다. 지금 있는 이 현실만을 비관하다가는 이도 안 되고 저도 안 되는 패배자의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것이므로 그들은 스스로를 난쟁이로 칭하길 나는 원치 않는다, 다만 성장을 위해서 겪는 성장통의 과정이라고 생각 하였으면 좋겠다. 자기 위로에 빠져 허덕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정말 기대하면 이루어지는 ‘시크릿 법칙’처럼, 성장통을 겪고나면 순식간에 자라나는 인간의 일반적인 패턴을 보며, 그들도 곧 그러한 패턴처럼 자라날 것이라는, 난쟁이들이 살아가는 사회에서 희망이라는 ‘작은 공’을 쏘아 올리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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